25화
풀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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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열 걸음 앞에 섰다.
지팡이를 앞에 놓고 두 손을 그 위에 포갰다. 어둠이 짙어서 얼굴은 반만 보였다.
수염이 희고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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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표국이라 했소."
"했습니다."
"…….."
"그러면 받는 말이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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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가 아무 말도 안 했다.
노인이 기다렸다. 지팡이 위에서 손가락이 한 번 움직였다.
"받는 말을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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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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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그 말을 들었다.
한지운이 서진하를 봤다. 서진하는 궤짝 끈을 잡고 있었다.
"안 배웠소?"
"안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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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국 사람이 그걸 안 배우는 수가 없소."
"…….."
"저는 표사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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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지팡이를 한 번 짚었다.
땅이 단단해서 소리가 났다.
"짐꾼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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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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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두 걸음 더 내려왔다.
가까이 오니 키가 서진하의 어깨쯤이었다. 등이 굽어서 그런 것이지 원래 작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궤짝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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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봤다.
보고 나서 손을 뻗었다.
"만져도 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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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가 궤짝을 내려놓았다.
두 손으로 놓았다. 놓고 뒤로 반 걸음 물러섰다.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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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앉았다.
앉는 데 시간이 걸렸다. 오른쪽 다리를 옆으로 뻗고 왼쪽만 접었다.
손이 봉인으로 안 갔다. 끈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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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끈 매듭을 잡았다.
엄지로 매듭 안쪽을 눌렀다. 누르고 한 번 당겼다. 매듭이 안 풀렸다.
당기는 방향을 바꿔서 또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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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맸소."
"제가 맸습니다."
"…….."
"누가 가르쳤소."
"오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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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손을 뗐다.
"오단."
그 두 자를 한 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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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니다."
한지운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저희 조부의 동무입니다."
노인이 고개를 안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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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듭이 제대로요."
노인이 그렇게 말했다.
"안쪽으로 두 번 넘기고 바깥으로 한 번 걸었소. 그걸 아는 손이면 배운 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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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아십니까."
노인이 대답 대신 자기 손을 폈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있었다. 손가락 밑동이 아니라 손날 쪽이다.
"끈 매는 데가 여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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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가 자기 손을 봤다.
같은 데가 굳어 있었다. 사 년 동안 그 자리만 두꺼워졌다.
한지운이 그것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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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
"말하시오."
"성함이 어찌 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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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일어서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치라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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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요."
"없소."
노인이 산 위쪽을 봤다.
"잃은 게 아니라 안 받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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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올라갔다.
한 마장쯤 가니 나무 사이에 움막이 있었다. 흙벽에 지붕이 짚이고 앞에 돌이 셋 놓여 있다.
앉는 자리가 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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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 불이 있었다.
노인이 먼저 들어가 불을 살렸다. 서진하가 궤짝을 문 안쪽에 놓고 그 옆에 앉았다.
한지운이 책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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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으시오."
노인이 말했다.
"오래 사니 말이 길어지오. 길어지면 틀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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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운이 붓을 들었다.
`치. 성 없음. 여섯째 자리 위 움막. 사십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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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년 맞습니까."
"맞소."
"…….."
"그동안 여기 계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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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었소."
노인이 불에 나무를 넣었다.
"내려간 적은 있소. 소금 받으러 일 년에 두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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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안 옵니까."
"오오."
노인이 말했다.
"오 년에 한 번쯤 나무꾼이 오오. 열 해 전에는 사냥꾼이 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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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국 사람은요."
노인이 불을 봤다.
"오늘이 처음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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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운이 그것을 적었다.
`표국 사람은 사십 년 만에 처음이라 함.`
적고 나서 붓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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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
서진하가 말했다.
"여기 아래에 팻말이 하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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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소."
"…….."
"누가 세웠습니까."
"내가 세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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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가 그 말을 받았다.
"두 자가 적혀 있습니다."
"차지(此地) 두 자요."
노인이 말했다.
"여기다, 라는 뜻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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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여기입니까."
노인이 대답을 안 했다.
일어나서 움막 안쪽으로 갔다. 벽에 나무 궤가 하나 있고 그 위에 뭔가 얹혀 있었다.
가져와서 돌 위에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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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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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끈이다. 궤짝을 지는 것이고 폭이 네 치쯤 된다.
색이 다 빠져 회색이 됐다. 원래는 남색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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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가 그것을 봤다.
집지 않았다.
"만져도 되겠습니까."
"만지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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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손으로 들었다.
무겁지 않았다. 삭아서 가벼워진 것이다.
한쪽 끝에 매듭이 있었다. 안쪽으로 두 번 넘기고 바깥으로 한 번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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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쪽 끝을 봤다.
거기는 매듭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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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벌어져 있었다.
실이 여럿으로 갈라져 있고 길이가 제각각이다. 긴 것과 짧은 것이 섞여 있었다.
서진하가 그 끝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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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지나간 자리는 끝이 나란하다.
칼이든 가위든 한 번에 지나가면 실이 같은 데서 끊긴다. 다섯째 자리 반권의 실이 그랬다.
이건 안 나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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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운이 옆에서 봤다.
"어떻습니까."
서진하가 끈을 돌 위에 놓았다.
"불에 가까이 대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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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운이 끈 끝을 불 쪽으로 가져갔다.
실이 밝은 데로 왔다. 갈라진 것이 열 가닥쯤 되고 끝마다 보풀이 났다.
서진하가 그중 하나를 잡아 당겨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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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졌다.
힘을 거의 안 줬는데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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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의 것을 당겼다.
이것은 안 빠졌다. 세 번 당기니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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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가 다릅니다."
서진하가 말했다.
"빠지는 힘도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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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운이 붓을 들었다.
"어떻게 적습니까."
"본 대로 적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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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 한 짝. 한쪽 끝에 매듭. 반대쪽 끝은 실이 갈라짐.`
`갈라진 실의 길이가 제각각. 당기는 힘도 제각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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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가 적힌 것을 봤다.
"한 줄 더 적으십시오."
"…….."
"반권의 실은 끝이 나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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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운이 그것을 적었다.
적고 나서 붓을 멈췄다.
노인이 불 건너에서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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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
서진하가 말했다.
"이 끈은 어디서 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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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나무를 하나 더 넣었다.
불이 한 번 커졌다가 가라앉았다.
"주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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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말입니까."
"팻말 세운 데요."
노인이 말했다.
"사십 년 전에 거기 떨어져 있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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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가 끈을 다시 들었다.
들어서 두 끝을 나란히 놓았다.
한쪽은 매듭이고 한쪽은 갈라진 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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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
"말하시오."
"그때 무엇을 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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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불을 봤다.
한참 봤다.
"그건 내일 산에 올라가서 말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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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불을 봤다.
한참 봤다.
"본 건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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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었습니다, 입니까."
"들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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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지팡이를 당겨 무릎에 놓았다.
"그해 이월이오. 눈이 늦게 왔소."
"…….."
"밤에 아래에서 소리가 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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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입니까."
"사람이 부르는 소리요."
노인이 말했다.
"말은 안 들렸소. 여기서 아래까지가 한 마장이오. 말은 안 들리고 소리만 들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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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운이 붓을 들었다.
`사십 년 전 이월 밤. 아래에서 사람이 부르는 소리. 말은 못 알아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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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이었습니까."
노인이 잠깐 있었다.
"둘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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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가 그 말을 받았다.
"둘인 건 어떻게 아십니까."
"높이가 달랐소."
노인이 손을 위아래로 한 번 움직였다.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았소. 번갈아 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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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갔습니까."
"한 식경쯤이오."
"…….."
"그러고는요."
"그쳤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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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운이 적었다.
`소리 둘. 높낮이 다름. 번갈아. 한 식경 뒤 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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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가 보셨습니까."
"밤에는 안 갔소."
노인이 말했다.
"아침에 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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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있었습니까."
"끈이 있었소."
노인이 돌 위의 끈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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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요."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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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가 끈을 다시 들었다.
한쪽은 매듭이고 한쪽은 갈라진 실이다.
소리가 둘이었고 남은 것은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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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
"말하시오."
"그날 아침에 자리가 어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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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내일 보여 주겠소."
노인이 그렇게 말했다.
"말로 하면 내 말이 되오. 자리는 아직 거기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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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가 남아 있습니까."
"남아 있소."
노인이 불에 나무를 넣었다.
"사십 년 동안 아무도 안 밟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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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바람이 한 번 왔다.
짚 지붕이 들썩이고 불이 옆으로 누웠다가 섰다.
한지운이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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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는 끈을 무릎에 놓고 있었다.
놓고 갈라진 끝을 한 번 더 만졌다.
보풀이 손끝에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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