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두꺼운 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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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 파했다.
해가 기울자 어귀의 좌판들이 하나둘 걷혔다. 등짐장수들이 남은 물건을 지고 여각 쪽으로 몰렸다. 국밥집만 불이 남았다. 뚝배기가 절반쯤 비었고, 남설의 손목엔 하루치 땀이 말라 소금기가 앉았다.
복단이 장부를 들고 부뚜막 앞에 쭈그렸다. 오랜만이었다. 지난 두 장을 복단은 국밥집에 얼굴을 잘 비치지 않았다.
"어르신, 이번 장은 그래도 받을 걸 받았거든요." 복단이 손가락으로 짚었다. "박 좌판이 여덟 돈 갚았고, 옹기전 늙은이가 쌀 두 되 지고 왔고. 아 글쎄, 짚신 노파는 또……."
"둬라." 정만호가 국솥을 저었다.
"이번이 네 장째거든요." 복단이 말끝을 늘였다. "이러다 그 이름 옆 빈자리가 장부에서 제일 넓어지겠어요."
남설이 손을 멈추고 그 이름을 들여다보았다. 옆이 비어 있었다. 지운 것도, 미룬 것도 아니었다. 남설은 이제 그 빈자리가 무슨 뜻인지 알았다.
"복단 어른." 남설이 물었다. "차 주인 여각에도 이런 빈자리가 있습니까."
복단의 손이 멎었다. 저도 모르게 소매를 만졌다. 그 안에 쌀 외상이 있었다.
"거긴 없거든요." 복단이 낮게 말했다. "차 주인은 빈자리를 안 둬요. 이름 옆이 비면, 그 자리에 이자를 적으니까."
바깥에서 발소리가 났다. 무게가 실린 걸음. 남설은 이제 그 걸음을 알아들었다.
차경이 들어섰다. 이번엔 옆구리에 낀 장부가 없었다. 대신 그것을 여각에 두고 온 자의 여유가 얼굴에 배어 있었다.
"정 어른." 차경이 문지방 안에 섰다. "장 잘 봤소이다. 헌데 짚신 노파 셈은 어른이 안 받으니, 내가 대신 받아 둘까 하는데."
정만호의 국자가 멈췄다.
"노파 외상은 내 장부에 있소." 정만호가 말했다.
"어른 장부에 있는 건 이름뿐이올시다. 옆이 비었으니 셈이 아니지요." 차경이 웃었다. "따져 보면 비워 둔 셈은 셈이 아니오. 노파 아들이 부역서 안 돌아왔으니, 노파 몫은 아들이 갚아야 할 것. 그 아들 몫을 내가 사 두면, 노파는 내 사람이 되는 게요."
남설의 칼이 도마에 어긋나게 닿았다.
정만호는 국솥에서 손을 뗐다. 뚝배기에 밥을 담고, 국물을 부었다가 따라냈다. 한 번, 두 번. 김이 서리 낀 문살에 닿았다.
"차 주인." 정만호가 말했다. "빈자리는 사고파는 게 아니오. 사람 사정을 기다리는 자리요."
"기다림도 값이올시다." 차경이 말끝을 늘였다. "어른은 기다리다 늙었고, 나는 사서 컸소."
차경은 남설을 보았다. 그러곤 한 걸음 부뚜막 쪽으로 다가섰다. 신을 털지 않은 채였다.
"남 낭자." 차경이 남설을 불렀다. "삼 년 전, 어미 약값을 나한테 빌리러 온 게 낭자였지. 헌데 그때 낭자 어미는 이미 병이 깊었소. 약값보다 급한 게 있다 하시더군. 갚을 사람을 찾는 일이라고."
남설이 고개를 들었다. 끝이 날카로운 눈이었다.
"차 주인은 그걸 어찌 아십니까."
"내가 이 어귀 셈을 이십 년 봐 왔다 하지 않았소." 차경이 정만호를 곁눈질했다. "낭자 어미가 찾던 사람이 어느 겨울 이 저잣거리로 흘러들었단 소문을, 나만 들은 건 아니었을 게요."
정만호의 손끝이 뚝배기 전을 눌렀다. 오른 어깨가 결렸다. 궂은 날도 아니었다. 그는 이번에도 누르지 않았다.
"차 주인." 정만호가 국자를 내려놓았다. "그 겨울 셈, 당신이 붙인 것 아니오."
방 안이 조용해졌다. 복단이 소매에서 손을 뗐다. 남설의 칼이 도마 위에 멈춘 채였다.
차경의 웃음이 잠깐 얇아졌다. 그러곤 다시 느긋해졌다.
"붙인 사람은 이름이 안 적히는 법이올시다." 차경이 몸을 돌렸다. "벤 사람만 적히지."
문지방을 넘기 전, 차경이 돌아보았다.
"장부는 여각에 두고 왔소. 옛날 것부터 적힌 그 장부 말이오. 두 분이 셈을 다 마치거든, 내가 마지막 장에 무얼 적을지 보러 오시오."
문이 닫혔다. 찬 기운이 발목을 감았다가 흩어졌다.
남설은 정만호를 보았다. 정만호는 국솥을 향해 몸을 돌린 채였다. 그의 오른 어깨가 미세하게 굽어 있었다. 남설의 눈이 그 어깨에 오래 머물렀다.
"어르신." 남설이 물었다. "벤 사람이 누굽니까."
정만호는 국자를 들었다. 식은 뚝배기에 뜨거운 국물을 부었다. 김이 올랐다.
"먹어라." 그가 말했다. "장 파한 값이다."
남설은 앉지 않았다. 대신 제 품을 만졌다. 그릇이 아니라 그 안쪽, 접힌 무언가가 있는 자리였다. 손끝이 잠깐 그 위에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바깥 어귀에 어둠이 내렸다. 여각 쪽에만 아직 불이 밝았다. 그 불빛 아래, 두꺼운 장부 한 권이 옛날부터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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