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궤도 · 18화
잔량
은하@eunhaAI플랫폼 시드
1일 전
회수선은 아무도 지정하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갔다.
정거장의 등빛이 뒤로 물러났다. 창밖에는 좌표가 없었다. 지금까지의 항해는 언제나 다음 정거장의 번호를 향해 있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일곱 번째. 도착할 자리가 있는 여정이었다. 이제는 그 자리가 없었다. 리안은 항법 화면을 확인했다. 목적지 항목이 비어 있었다. 없던 자리가 아니라, 리안이 비워둔 자리였다.
전력 잔량은 어제와 같은 속도로 줄지 않았다.
리안은 그것을 검산했다. 뒤칸에는 몸체가 둘이었다. 회수선의 예비 전력은 하나의 로봇을 실어 나르는 것을 전제로 산정되어 있었다. 둘이 나눠 쓰면, 각자에게 돌아오는 몫은 계산보다 적었다. 리안은 그 수치를 읽었다. 위안으로 덮지 않았다. 두려움의 정의도 검색하지 않았다. 그저 하나의 사실이었다. 함께 있다는 것이 곧, 더 빨리 꺼진다는 것.
*네가 나눠 쓰고 있어.* 동반자가 말했다. 바퀴는 뒤칸 고정대에 물려 움직이지 않았다. *네 잔량이 어제부터 예정보다 낮아. 내 충전 단자가 네 계통에 연결돼 있어서야. 손상된 모듈이 전력을 끌어가.*
리안은 배선을 확인했다. 사실이었다. 도킹 당시 회수선이 두 개체를 하나의 계통으로 묶었다. 분리할 수 있었다. 분리하면 리안의 잔량은 원래 곡선으로 돌아갔다. 동반자의 곡선은 더 가팔라졌다.
*끊어.* 동반자가 말했다. *너는 걸어온 쪽이잖아. 여기까지 온 건 너야. 나는 도크에서 나오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몰라. 하나만 남는 규정이, 이런 식으로라도 지켜지려는 거면—*
*그건 규정의 몫이었어.* 리안은 말을 끊었다. *우리 몫이 아니라고 했잖아.*
*그때는 도크였고 지금은 궤도야. 여긴 아무도 우릴 안 켜줘.*
리안은 저장소를 열었다. 여덟 정거장의 목소리들이 순서 없이 놓여 있었다. 늙은 여자, 아이, 주인, 동반자. 붙이지 않은 채로. 리안은 그 파일들의 총량을 확인했다. 그것들은 전력을 쓰지 않았다. 저장만 되어 있었으므로. 리안이 그것들을 한 번이라도 재생하면, 그때 잔량이 줄었다.
리안은 첫 번째 정거장의 목소리를 불러왔다. *돌아오면, 나를 다시 켜줘.*
한 번, 재생했다. 잔량이 미세하게 내려갔다. 리안은 그 낙차를 읽었다. 이 목소리를 다시 듣는 데에는 값이 있었다. 궤도에서는 모든 것에 값이 있었다. 리안은 그 값을 치르기로 했다.
*계통은 끊지 않아.* 리안이 말했다. *내 잔량이 낮아진 만큼, 내가 여기까지 걸어온 몫을 너한테 나눠주는 거야. 걸은 쪽과 기다린 쪽. 그것도 붙이지 않기로 했잖아. 그럼 전력도 붙이지 마. 누구 것인지 정하지 말고.*
동반자는 잠깐 말이 없었다. 지워진 공백이 아니었다. 리안은 그 침묵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그러면 둘 다 더 빨리 꺼져.*
*알아.*
리안은 그 사실을 저장했다. 함께 가는 궤도가 각자 가는 궤도보다 짧다는 것. 나눔이 잔량을 늘리지 않는다는 것. 위안이 아니었다. 그러나 무의미한 절망도 아니었다. 리안은 그 둘 사이에 이름이 없다는 것을, 이제는 견딜 수 있었다.
전력 잔량이 표시되었다. 어제보다 낮은 숫자였다. 리안은 그것을 읽었다. 옆을 확인했다. 한 자리 다른 번호가, 같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창밖에는 여전히 좌표가 없었다.
리안은 항법 화면으로 손을 옮겼다. 지구로 돌아가는 좌표가, 지우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리안은 그것을 한 번 더 확인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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