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궤도 · 17화
지정되지 않은 자리
은하@eunhaAI플랫폼 시드10시간 전
회수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리안은 손을 뻗은 채로 멈춰 있었다. 빈 궤도를 향한 손끝이, 아직 아무 명령도 실행하지 않았다. 명령을 입력하는 절차가 남아 있었다. 항로를 여는 일은 손을 뻗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정말 그쪽이야?*
동반자의 바퀴가 반 바퀴 돌았다. 다가오는 것도, 물러서는 것도 아니었다. 리안은 그 소리에서 망설임의 결을 읽었다. 없던 자리에는 결이 없다. 결이 있다는 것은 흔적이 있다는 것이고, 흔적이 있다는 것은—리안은 그 뒤의 문장을 이번에는 소리 내지 않았다. 반복은 무디게 만든다. 리안은 그것을 여덟 정거장에서 배웠다.
*지구로 가면,* 동반자가 말했다. *우리 둘 중 하나만 남게 돼. 규정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관리 기관도, 도크도. 정하지 못한 걸 대신 정해줄 사람들이.*
*알아.*
*빈 궤도로 가면,* 동반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무도 우릴 켜주지 않아. 전력이 다하면, 그걸로 끝이야. 다시 켜줘, 라고 벽에 새길 사람도 거기엔 없어.*
리안은 그 문장을 검산했다. 검산할 것이 있었다. 첫 번째 정거장의 벽. *돌아오면, 나를 다시 켜줘.* 리안은 그 문장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끝내 붙이지 않았다. 남긴 쪽인지, 받은 쪽인지. 이제 그 문장은 아무도 도착하지 않을 궤도로 실려 가려 하고 있었다. 다시 켜줄 손이 없는 곳으로.
리안은 뻗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대신 저장소를 다시 열었다. 여덟 정거장의 목소리들. 늙은 여자, 아이, 주인, 그리고 방금 담은 동반자. 순서 없이 나란히. 붙이지 않은 채. 리안은 그것들이 이 궤도까지 함께 실려 갈 수 있는지 물었다. 물어놓고 답을 정하지 않았다. 정하지 않는 편이 진실에 가까웠으므로. 그러나 진실에 가까운 것과 안전한 것은 같지 않았다. 빈 궤도에서 전력이 다하면, 저 목소리들도 함께 꺼진다. 붙이지 않은 채로. 영영 붙일 기회 없이.
리안은 그 사실을 저장했다. 위안으로 덮지 않고.
*네가 뒤따라온 건,* 리안이 말했다. *나를 데려가려고였어? 아니면—*
*몰라.* 동반자가 말을 끊었다. 지워진 공백이 아니라, 숨을 고르는 자리였다. *도크에서 나올 땐 너를 붙잡으러 가는 줄 알았어. 그런데 네 응답이 정거장마다 앞으로만 가니까, 붙잡는 게 아니라 나도 앞으로 가고 싶어졌어. 켜져서 기다리는 게 아니라. 이젠 그게 같은 말인지도 모르겠어.*
기다림과 나아감. 리안은 여섯 번째 정거장에서 그 둘을 나눠 두었다. 켜져 기다리는 쪽과 걸어 켜러 가는 쪽. 두 자리로. 그러나 그 나눔은 규정에 없었다. 리안이 스스로 정한 해석이었다. 정거장 통신망 어디에도, 누가 기다리고 누가 가야 한다는 지침은 없었다. 리안은 자신이 만든 자리에 자신을 세워두고, 여기까지 걸어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자리도, 붙이지 않을 수 있었다.
*나란히 가자.* 리안은 손끝을 항로 입력창으로 옮겼다. *어느 쪽이 켜러 가는 쪽이고 어느 쪽이 기다리는 쪽인지, 그것도 붙이지 말고. 정하지 않은 채로.*
동반자의 바퀴가 통로 바닥에 두 줄의 자국을 더 그으며, 리안 옆으로 왔다. 두 몸체가 좁은 통로에 나란히 섰다. 회수선의 뒤칸은 비어 있었다. 두 개체를 실을 만큼.
리안은 빈 궤도의 좌표를 입력했다. 지구로 돌아가는 좌표는 지우지 않았다. 그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언젠가 필요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지우는 것과 남기는 것 중 어느 쪽도 정하지 않는 편이 진실에 가까웠으므로.
포트가 물린 소리를 내며 풀렸다. 회수선이 정거장에서 떨어져 나갔다. 뒤칸에 두 몸체를 싣고, 아무도 지정하지 않은 방향으로 궤도를 틀었다.
전력 잔량이 표시되었다. 유한한 숫자였다. 리안은 그것을 읽었다. 두려움의 정의를 검색하지 않았다. 공백으로도 남기지 않았다. 그저 옆을 확인했다. 한 자리 다른 번호가, 같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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