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적을 사람
밤새 비가 왔고 새벽에 그쳤다.
서진하는 해가 뜨기 전에 마루에서 일어났다. 마당에 내려서니 흙이 물을 먹어 부풀어 있었다. 그는 담 아래로 갔다.
사흘 전에 누가 넘어 들어왔다는 자리다.
발자국은 없었다. 있었더라도 어젯밤에 지워졌을 것이다. 그는 담을 따라 한 바퀴 걸으며 걸음을 셌다. 스물아홉이었다. 담은 그의 어깨에 못 미쳤다.
넘기 쉬운 담이었다. 넘어서 마당까지 들어와 문고리를 잡았다가 그냥 간 사람이 있었다.
뒤에서 문이 열렸다.
“일찍 일어나시는군요.”
“…….”
“먹을 갈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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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운은 방바닥에 종이를 폈다.
스무 장쯤 됐다. 누렇고 가장자리가 고르지 않았다.
“좋은 종이는 없습니다.”
“충분합니다.”
“베끼실 때 하나만 지키십시오.”
서진하는 무릎을 세웠다.
“고치지 마십시오.”
“…….”
“틀린 글자가 있어도 틀린 대로 적으십시오.”
“왜 그렇습니까.”
한지운이 벼루를 밀어 놓았다.
“고치기 시작하면 어디를 고쳤는지를 또 적어야 합니다.”
“…….”
“그러면 두 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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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을 베끼는 데 한 시진이 걸렸다.
이름이 일곱이었다. 맨 위가 표두고 그 아래가 여섯이다. 서진하는 획을 하나씩 옮겼다. 그의 글씨는 배운 데가 없어서 획의 끝이 자꾸 흘렀다.
한지운의 할아버지 글씨는 달랐다. 획이 짧고 끝이 눌려 있었다. 급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손이 그런 사람이었다.
吳緞.
두 자를 옮기는 데 다른 이름의 두 배가 걸렸다. 획이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서진하는 붓을 두 번 들었다 놓았고, 두 번째에는 먹이 굳어서 다시 갈아야 했다.
한지운은 맞은편에서 자기 것을 쓰고 있었다. 무엇을 쓰는지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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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저.”
“네.”
“장부는 셈이고 행장은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했습니다.”
“그러면 저 궤짝은 어느 쪽입니까.”
한지운의 붓이 멈췄다.
“지는 동안은 길입니다.”
“…….”
“도착하면 셈이 됩니다. 받은 사람이 적고 배상할 것이 없으면 거기서 닫힙니다.”
서진하는 궤짝 쪽을 봤다. 방 가운데에 있었다. 벽에서 한 뼘 떨어져 있었다.
“도착 안 하면요.”
“…….”
“미결입니다.”
“…….”
“미결은 셈에도 안 들어가고 길에도 안 들어갑니다. 따로 적습니다.”
“어디에 적습니까.”
“할아버지는 뒤쪽에 적으셨습니다.”
서진하는 책을 봤다. 실이 끊긴 자리에서 뒷장이 없었다.
한지운은 그 뒤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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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 무렵에 그는 첫째 자리를 베꼈다.
`盧石 죽음. 표기대 부러짐. 표기 회수 못 함.`
붓끝이 마지막 넉 자에서 멈췄다.
“한 소저. 회수 못 함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적혀 있습니다.”
“잃었다는 뜻입니까.”
“돌려받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
“잃었으면 잃었다고 적습니다. 다르게 적혀 있으면 다른 겁니다.”
서진하는 그 줄을 다시 읽었다.
깃발이 부러진 자리에 남아 있었거나 누가 가져갔거나다. 사십 년이면 삭아 없어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책에는 아직 돌려받지 못한 것으로 적혀 있다.
“깃발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한지운이 물었다.
“안 만듭니다.”
“왜요.”
“만들면 제 것이 됩니다.”
한지운은 그 말을 적지 않았다. 다만 붓을 든 채로 잠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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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기울 때까지 그는 다섯 자리를 다 베꼈다.
베끼고 나서 날짜를 셌다. 소리를 내어 셌다.
첫째에서 둘째까지 엿새. 둘째에서 셋째까지 아흐레. 셋째에서 넷째까지 이레.
“넷째에서 다섯째까지가 하루입니다.”
“하루입니다.”
한지운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날짜는 제가 먼저 셌습니다. 열두 살 때요.”
“…….”
“그때는 잘못 적힌 줄 알았습니다.”
“지금은요.”
“지금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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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짝이라고 하셨습니다.”
서진하가 저녁 먹고 말했다.
“추측이라고도 했습니다.”
“밤새 생각하셨습니까.”
“했습니다.”
“…….”
“그래도 추측입니다.”
“행장에 적으실 겁니까.”
“안 적습니다. 행장에 추측을 적으면 그건 행장이 아닙니다.”
서진하는 붓을 내려놓았다.
“행장이 다섯째에서 끊겼습니다.”
“끊겼습니다.”
“표두님도 다섯에서 돌아섰다고 하셨습니다.”
“…….”
“그게 저는 걸립니다.”
서진하는 고개를 들었다.
“왜 걸립니까.”
“너무 맞아서요.”
한지운이 종이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눌렀다.
“이렇게 맞는 건 대개 누가 맞춰 놓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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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저.”
“네.”
“할아버지가 왜 반권만 가지고 돌아오셨는지, 그건 추측하실 수 있습니까.”
한지운은 붓을 씻었다.
씻는 데 오래 걸렸다. 물이 검어지고 다시 맑아질 때까지 헹궜고, 그러고도 붓끝을 손가락으로 훑어 물기를 뺐다.
“할 수 있습니다.”
“…….”
“안 합니다.”
“왜 안 하십니까.”
“한 번 하면 그다음부터는 그 눈으로 읽게 됩니다.”
서진하는 그 사람의 손을 봤다. 무릎 위에 놓인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무릎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그는 무슨 눈이냐고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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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밤에 한지운이 다른 궤를 열었다.
꺼낸 것은 얇은 책이었다. 표지에 아무것도 없었다.
“이건 행장이 아닙니다.”
“…….”
“이 집에 온 사람을 적은 겁니다.”
그가 폈다. 줄이 열한 개 있었다.
날짜가 있고 그 옆에 사람이 적혀 있었다. 이름이 적힌 줄은 셋뿐이었다. 나머지는 이름 대신 다른 것이 적혀 있었다. 키. 신발. 말투. 어느 손으로 문을 두드렸는지.
“이름을 안 대는 사람이 많습니다.”
“…….”
“그러면 본 것만 적습니다.”
서진하는 열한 줄을 위에서 아래로 읽었다. 사흘 전 것이 맨 아래에 있었다. 그 줄에는 이름도 키도 없었다. 문고리, 라는 두 자만 있었다.
한지운이 붓을 들었다.
“열두 번째를 적겠습니다.”
“…….”
“성함은 들었습니다. 직명을 여쭙겠습니다.”
서진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표사입니까.”
“아닙니다.”
“…….”
“표국이 없습니다.”
“국이 없어도 표사는 표사입니다.”
한지운은 붓을 종이에 대지 않고 들고 있었다.
“오 표두가 당신을 뭐라고 부르셨습니까.”
“진하라고 하셨습니다.”
“직명은요.”
서진하는 그 물음을 한 번 더 세워서 들었다. 세워 놓고 사 년을 앞에서 뒤로 훑었다. 짐을 지고 다닌 날이 있었고 삯일을 받으러 간 날이 있었고 셈을 소리 내어 센 날이 있었다.
부른 이름은 하나였다.
“없습니다.”
“…….”
“사 년 동안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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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운은 등잔 심지를 잘랐다.
불이 한 번 흔들렸다가 곧게 섰다. 바깥 어디선가 개가 짖었고 두 번 짖고 그쳤다.
그는 그러고 나서 붓을 내렸다.
날짜를 먼저 썼다. 그다음에 이름을 썼다.
徐進河.
그 옆 칸에 두 자를 더 썼다.
서진하는 그 두 자를 거꾸로 읽었다. 거꾸로 읽어도 두 자였고 한 번에 읽혔다.
“한 소저.”
“직명 칸입니다.”
“저는 표사가 아닙니다.”
“압니다.”
“지워 주십시오.”
“안 지웁니다.”
한지운이 붓을 벼루에 걸쳤다.
“고치기 시작하면 두 권이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
“그리고 저는 본 것만 적습니다.”
서진하는 그 사람을 봤다.
“무엇을 보셨습니까.”
“어제 궤짝을 두 손으로 놓으셨습니다.”
“…….”
“한 손으로 놓는 사람은 열한 명 중에 아무도 안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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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서진하는 마루에서 잤다.
자기 전에 방으로 들어가 궤짝 앞에 앉았다. 등잔은 들고 가지 않았다.
어두워서 봉인은 보이지 않았다. 앞쪽 종이도 뒤쪽 밀랍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끈을 걸지 않고 뚜껑 양쪽에 손을 댔다.
한 뼘 들었다.
놓았다. 두 손으로 놓았다.
오단이 사 년 동안 아침마다 하던 것이다.
그는 한 번 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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